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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해협 우주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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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종의 경쟁과 설계국의 경쟁 === 루이나의 우주개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군과 공군의 경쟁이었다. 1958년 항공우주법이 군사 우주를 국방부에 맡기면서도 담당 군을 정하지 않았고, 이후 모든 주요 사업이 두 군의 주도권 다툼 끝에 타협의 형태로 결정되었다. 1961년 국가정찰국의 설립, KESTREL의 공중·해상 회수 병행, 1968년 CROW'S NEST의 합동 사업화, 해군의 KINGFISHER와 공군의 AQ-7이라는 두 개의 위성 요격 무기가 모두 그 산물이다. 이 경쟁에서 대체로 우위를 점한 쪽은 해군이었다. 루이나의 첫 위성, 첫 전자정찰위성, 항법위성, 해양감시위성, 유인 궤도 관측소가 모두 해군 사업이었고, 1971년 HIGH TIDE 기각으로 전략 억지력의 중심이 바다에 놓이면서 궤도는 해군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루이나 군 내에서 해군과 해군정보부의 발언권이 가장 강하다는 사실은 우주개발의 방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독립 우주군의 창설이 2019년까지 늦어진 것도 해군이 자신의 궤도 자산을 내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사비에트는 사정이 달랐다. 궤도방위군은 1966년에 이미 독립 군종으로 창설되었고, 군사 우주는 처음부터 국방인민위원회 아래 하나의 지휘 체계로 묶여 있었다. 대신 사비에트의 경쟁은 설계국 사이에서 벌어졌다. 과학 위성과 정찰위성, 유인 비행을 중시한 발렌틴 P. 오를로프의 제1설계국과, 부분궤도 폭격체계와 무장 정거장, 위성 요격 무기를 밀어붙인 예브게니 A. 스테파노프의 제7설계국은 예산과 발사 순서를 두고 끊임없이 경쟁했다. 1968년 오를로프가 사망한 뒤 제7설계국의 영향력이 커졌고,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사비에트 우주개발이 가장 공격적인 형태를 띤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 때문에 루이나에서는 "루이나는 군복이 싸웠고, 사비에트는 도면이 싸웠다"는 말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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